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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일기/영국 감정

브랜딩 매니저의 하루

by 이세계 아이돌 2025. 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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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궁금하지 않을 내 인생 이야기

한국을 떠난지 거의 4년이 되어간다. 처음 한국을 떠날 때만 해도 이렇게 체류기간이 길어질 지 몰랐다. 내가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건 예상하지도 못한 일이었다. 2년 정도로 끝낼 생각이었던 해외생활이 영구적인 정착으로 바뀔 거라는 건 예정에 없는 일이었다. 그저 적당히 영어회화 좀 배우면서 해외경험을 쌓고, 적당히 그걸 연료삼아서 살아갈 생각이었다.

인생은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다. 내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는 나를 외롭게 했고, 결정적으로 아버지가 사기를 당해서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딱 여기까지인 것 같다. 여기서의 생활은 행복했고, 앞으로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영국생활 요약

바로 일을 시작하기엔 영어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어학연수부터 받았다. 반년짜리 어학연수였고, 아일랜드에서는 어학연수중에도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것이 합법이어서 돈 걱정 없이 지낼 수 있었다. 기초자금이 넉넉하지 않아서 월세 싼 곳으로 이사간 후에는 하루에 두끼만 먹었다. 한끼는 빵으로 대충 먹었고, 한끼는 내가 일했던 식당에서 해결했다. 먹는 것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내 주위에는 항상 사람이 모였고 나는 그게 좋았다. 오히려 나도 친구들도 영어를 잘 못해서 더 쉽게 친해졌던 것 같다.

아일랜드에서 어학연수가 끝난 후에는 런던에서 1년정도 지내다가 다른 지역으로 가서 1년정도 공부하다가 다시 런던에서 지내다가 지금은 또 다른 지역으로 왔다. 어쩌다보니 거의 4년 되는 기간을 서로 다른 F&B 직종에서 일을 하게 됐다. 쉐프로서도 일했고, 바리스타로도 일했고, 호텔에서는 재료준비를 했고, 그러다가 지금 일하는 곳까지 오게 되었다.

일하던 곳이 폐업을 하고 사장님이 바뀔 예정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내 파트너가 일하는 식당으로 넘어가려고 노티스를 내고 거의 5주 동안 주7일 근무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그렇게 근무하고 받게 될 월급을 생각하니 기분은 좋았다. 그러다가 새로 바뀐 사장님들이 나에게 매니저 자리와 브랜딩 권한을 제시하며 영입했고 그렇게 나는 매니저가 되었다.

사실 관리직으로 올라가는 것은 항상 부담스러워서 도망치듯 이직했다. 수쉐프 트레이닝을 받고나서, 카페에서는 쉬프트 리더 제안을 받고나서, 호텔에서는 정식 쉐프를 제안받고나서 나는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도망쳤다. 개인적인 사정과 맞물린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도망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내가 매니저 자리를 오케이 하고 받아들인 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제 2의 대학생활

나는 어떻게든 런던에서 공부를 하고 싶었다. 내 전적대 전공은 영국에서 전혀 쓸모가 없었다. 이제 나이도 있어서 내 체력상 이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런던에 있는 대학교에 전부 지원을 했다. 다 광탈했다. 킹스칼리지런던, LSE, 퀸메리대학교, 시티대학교까지 줄줄이 떨어지고 나서 다른 대학교들에 개별 연락을 시도했다.

전적대 성적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해서 한 곳쯤은 붙겠지 싶었는데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한지 10년이 넘는데도 고등학교 성적이 내 발목을 잡았다. 전적대 성적과 아이엘츠 성적, 해당 전공을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걸 입증하기 위해 증거를 들이밀어도 리젝됐다. Equivalent 받아준다면서 어떻게 된 일이지. 사실 중상위권으로는 갈 수 있는 곳이 많았지만, 런던에서 멀리 떨어지기 싫어서 적당한 대학교에 지원했다. 내가 만약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에 귀국해야 한다면 대학교 간판이 신경쓰였겠지만, 비자 걱정도 없고, 취업 난이도도 사실상 유학생 신분으로 있는 것보다는 쉬울 거라는 건 확실해서, 런던 근교에 남게 되었다.

이게 이번에 내가 매니저 포지션을 받아들이게 된 이유다. 나는 영국에서 거주한지 3년이 넘어가고, 배우자가 시민권자이기 때문에 Home Student로 분류된다. 학자금 대출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사실 마음만 먹는다면 학교 다니는 중에 일을 하지 않는 것도 가능하기는 하다. 그런데 졸업하고 나서 그 빚을 다 갚고 나면 나는 40대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빚의 크기를 어떻게든 줄이고 싶었다. 매니저 포지션이라 일하는 시간대비 시급도 높고, 일하는 중에는 밥값도 줄고, 아직까지는 만족스럽게 지내고 있다.

칵테일 만들기칵테일 만들기칵테일 만들기

 

바 트랜지셔닝

지금 내가 원래 일하던 곳은 사장님 바뀌기 전에는 칵테일 메뉴가 몇 개 없었다. 굳이 바 섹션이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을까 십을 정도로. 이번에 사장님이 바뀌고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칵테일 메뉴를 들여온 거였고, 그래서 나는 예상하지도 못하게 바 트레이닝을 받았다. 클래식 칵테일 메뉴로 15개를 받아왔고, 이 메뉴들에 익숙해지면 바리에이션을 추가할 예정이라고 했다. 영화를 볼 때마다 바텐더가 섹시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내가 해보니 원숭이가 몽키 몽키 매직 하는 것 같다. 쉐이커를 흔드는 건 쉬운데, 있어보이게 흔드는 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금은 일단 너무 허우적거려서 내가 칵테일 만드는 걸 손님들이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남자 화장실 위생점검표여자 화장실 위생점검표장애인 화장실 위생점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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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업무

내가 매니저 타이틀을 달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모든 위생 관련 점검표를 문서화하고 아카이빙하는 일이었다. 기존의 사장님이 출력해둔 문서들은 거의 떨어져가는데 원본 파일을 인수인계받지 못해서 그냥 내가 만들기로 하고 만들었다. 기존에 있던 항목에서 필요없는 항목, 그리고 이제는 쓰지 않아서 청소계획에 넣지 않아도 되는 물품들은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조만간 검사관이 온다고 해서 부랴부랴 HACCP과 위생 관련된 문서들을 최우선으로 만들고 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도 내 업무의 범위가 넓은 것 같다. 일단 내가 맡게 될 업무는 손님 응대, 직원교육, 칵테일 제조, 업무 문서 관리, 디자인, 마케팅, 브랜딩이다. 매니저로서 일을 시작한지는 몇 주 안됐는데 벌써부터 많은 난관을 겪고 있다. 내 배는 항상 산으로 유배되는 중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은데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일기를 쓰는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써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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